빗속 산복도로에서 피어난 흰 가운의 사랑
빗속 산복도로에서 피어난 흰 가운의 사랑
온병원·그린닥터스재단 의료진 30여 명, 미애원서 의료봉사
동구 수정4동 산만디 거동 불편한 어르신 왕진 서비스 펼쳐
비가 잦아들다 다시 흩날리던 주말인 13일 오후, 부산 동구 수정4동 산복도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낡은 담벼락 안쪽, 사회복지시설 ‘미애원’의 이름이 드러난다. 한때 수많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메웠던 이곳은 이제 단 한 명의 원아만 남아 적막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비 내린 마당에 모처럼 다른 기운이 스며들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이 우산을 털며 좁은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낡은 보육원은 작은 병원으로 변했다. 그린닥터스재단과 온병원 의료봉사단 소속 의사·한의사·간호사 등 30여 명이 준비한 자리였다. 마을 주민들은 누구랄 것 없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의료진은 차트 대신 따스한 웃음을 내주었고, 정근 이사장(안과전문의)은 문진지를 손에 꼭 쥐고 직접 주민 곁에 앉았다. 김윤준 온병원 부원장(정형외과전문의)은 무릎을 꿇고 할머니의 다리를 두드렸고, 전창원 응급센터 과장은 전날 밤샘 근무에도 단단한 표정으로 청진기를 귀에 걸었다.
진료를 마친 몇몇 의료진은 다시 왕진 가방을 둘러메고 골목 위로 향했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계단, 물이 고인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끝에서 기다린 것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이었다.
첫 집의 주인공은 올해 85세 김 모 할머니. 20여 년 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으나 이제는 그 기능성이 크게 떨어져 걷기조차 쉽지 않다. 왼쪽이 더 심하게 망가져 다시 교체 수술이 필요하지만, 그는 담담히 “그냥 살다 가야지….”라며 말했다. 시력도 백내장, 녹내장 수술 이후 흐릿해져 남은 세상조차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약 몇 알, 파스와 인공눈물이 그의 일상 전부다.
두 번째 왕진 갔던 집 부부의 사연은 더 절절했다. 88세 박 모 할머니는 오랜 류머티스 관절염에 시달리다 2년 전부터는 아예 걷지 못한다. 중환자실과 종합병원을 오가며 각종 검사를 받았지만, 돌아온 처방은 “운동을 하라”는 말뿐이었다. 몇 년 전 겨울, 넘어져 팔이 부러졌을 때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일주일간을 집에서 버텼다. 결국 119로 병원에 이송돼야 했다. 이후 식사조차 어려워져 액상 영양식에 의지해 살고 있다. 살이 빠지며 기력마저 잃은 지금,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꾸준한 돌봄이었다. 그러나 행정 지원은 여의치 않았고, 그의 가족은 “병원 차원에서라도 도움 받을 길이 없겠느냐”며 희망을 붙잡았다.
그 곁에는 남편 김 모(89) 씨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부두에서 컨테이너에 부딪혀 쇄골 수술을 받았으며, 지금도 팔이 다 펴지지 않는다. 통증이 몰려와도, 그는 입을 다문다. “내가 아프다 하면 누가 아내를 보겠소.” 그 말에는 평생 노동으로 다져진 어깨보다 더 묵직한 책임감이 배어 있었다.
시간이 흘러 해질 무렵, 미애원 식당은 또 다른 무대로 변했다. 의료진이 가져간 음향기기로 차려진 노래자랑무대 위에서 어르신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청진기를 걸었던 손은 박수를 치는 손이 되었고, 환자와 의사는 무대와 객석으로 자리를 맞바꿨다. 트로트 가락에 웃음과 환호가 터져 나왔고, 잠시나마 골목 위에 그늘졌던 삶의 무게는 흩날리는 노랫소리에 실려 사라졌다.
“다른 병원들도 함께 해주면 좋겠다.” 한 주민의 바람은 수줍지만 진심이었다. 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을 비롯한 온병원 의료진은 “앞으로도 의료 소외계층을 찾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그날, 부산 동구 수정동 산복도로 미애원의 비 내린 풍경은 순간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바뀌었다. 빗소리와 웃음소리, 노랫소리가 섞여 울려 퍼진 좁은 마당. 무릎과 팔, 흐릿한 시력과 기력이 더 이상 버팀목이 되지 않는 노인들의 삶 한가운데로 흰 가운 입은 의사들이 희망의 꽃으로 피어났다. 낡은 건물 위로 내려앉은 그 하루는, 오래도록 기억될 ‘늦여름 왕진의 풍경’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