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잃어버린 기억, 누군가의 발이 되길…”
“남편이 잃어버린 기억, 누군가의 발이 되길…”
10년 치매 병수발 하다 남편 사별한 80대 아내의 사부곡(思夫曲)
부산 온요양병원에 조의금 일부 100만 원 기탁
“치매 환자들, 휠체어 타고 바깥세상 구경했으면”

최근 부산의 한 병원 로비. 치매 환자가 실종됐다는 신고에 경찰과 보안 요원들이 긴박하게 움직이며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다행히 환자는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이 광경을 지켜보며 남몰래 눈시울을 붉힌 이가 있었다. 최근 10년간 알츠하이머를 앓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이 모(80) 씨다.
이 씨에게 병원 로비의 소란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정년퇴직 후 10여 년 쯤 지났을까. 남편은 뜻밖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으며, 그때부터 최근까지 그녀는 남편의 ‘기억 저장소’가 되어 살아왔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집을 나선 남편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고, 길 위에서 실수하는 남편을 향한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막아내던 고통의 세월이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비로소 마주한 ‘해방’의 시간을 맞았으나, 이 씨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위한 휴식이 아닌 ‘나눔’이었다. 이 씨는 지난 28일 부산 온요양병원을 찾아가 현금 10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넸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남편의 이름으로 마지막 선물을 남기고 싶다는 뜻이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이 씨의 뜻은 단단했다. 그녀는 “남편이 병마와 싸우며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들이, 이제는 다른 환자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며 “정신이 미약해진 이들을 돕는 데 써달라”고 전했다.
온요양병원과 같은 의료법인 온그룹의료재단의 온병원에서 운영하는 한국건강대학을 졸업한 이 씨는 또 “평소 어르신 건강증진 교육, 무료급식 봉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의료봉사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오고 있는 온병원 관계자들을 늘 응원해왔고, 그들을 통해 기부의 의미도 알게 됐다”는 말로 이번 작은 기부의 듯을 이해하게 했다.
온요양병원 측은 이 귀한 기부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심한 끝에, 거동이 불편한 장기 입원 환자들을 위해 ‘이동용 휠체어’가 필요하다고 보고, 모두 4대를 구입했다. 병원 안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가족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환자들이 이 휠체어를 타고 병원 근처를 산책하며, 잠시나마 살아있음의 온기를 느끼게 하겠다는 취지다.
온요양병원 김동헌 병원장(전 부산대병원 병원장)은 “초고령화 사회인 부산에서 치매는 이제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닌 우리 이웃 모두의 아픔”이라며, “기부자의 숭고한 뜻을 담아 환자들이 세상 밖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소중히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누군가는 기억을 잃어가고,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사랑으로 채우는 부산의 풍경이다. 이 씨가 건넨 100만 원은 단순한 돈을 넘어, 길 잃은 영혼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 따뜻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