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우크라이나·베트남 잇는 눈물겨운 ‘골든타임’
한국·우크라이나·베트남 잇는 눈물겨운 ‘골든타임’
서른 살 우크라이나 여성, 호치민서 약물과다 복용으로 혼수상태
현지병원서 13시간 수술 끝에 간 기능 일부 회복에도 ‘뇌부종심각’
환자보호자 측, “한국서 뇌감압술 희망”…이송 가능조차 확신 없어
온병원 뇌혈관센터 최재영교수, “원한다면 당장 달려가 개두수술”

전쟁의 상흔을 안고 우크라이나의 전후 재건을 위해 뜨겁게 발로 뛰고 있는 전직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의 휴대전화가 주말인 지난 12일 오후 3시쯤 다급하게 울렸다. 화면에 찍힌 발신자는 우크라이나 국회의원이자 한·우크라이나 의원친선협회 N 의원. 카카오톡 메시지 너머로 전해진 소식은 청천벽력 같았다. 우크라이나 유력 인사의 30세 딸 A가 베트남 호치민에서 약물 중독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간절한 호소였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부산,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그리고 환자가 머물고 있는 베트남 호치민을 실시간으로 잇는 3개국 간의 숨 가쁜 삼각 소통이 막을 올렸다. 국경과 이념을 뛰어넘어 꺼져가는 한 젊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눈물겨운 인류애의 드라마다.
■타이레놀 과다복용이 부른 비극… 13시간 대수술 끝에 찾아온 위기
사건의 발단은 이달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환자인 A는 지난 3일 아세트아미노펜(타이레놀)을 과다 복용하면서 전격적인 급성 간독성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신장이 망가지고 뇌부종까지 연쇄적으로 발생했다.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현지 빈멕 병원을 거쳐 호치민의 대형 의료기관인 초라이(Cho Ray) 병원으로 이송된 그녀는 무려 13시간에 달하는 대수술을 견뎌냈다. 다행히 집중 치료 덕분에 망가졌던 간과 신장 기능은 일차 고비를 넘기며 조금씩 회복세를 보였다.
하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목을 잡았다. 전신에 퍼진 심각한 뇌부종으로 인해 뇌압이 통제 불능 상태로 치솟은 것이다.
■“자가용 비행기라도 대절할 테니…” 남편의 절박한 이메일
환자의 남편 D는 자국 지인의 인맥을 총동원해 한국 의료진의 손길을 구걸했다. 때마침 한·우크라이나 의원친선협회 N 의원을 통해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으로 현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L 전 우크라이나 한국대사에게 연락이 닿았고, 사연은 곧바로 부산 온병원(병원장 김동헌·전 부산대병원 병원장)으로 전해졌다.
주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온병원 뇌혈관센터 최재영 센터장(전 고신대복음병원 신경외과 교수)은 A 전 대사의 주선으로 연결된 남편 D와 직접 영문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환자의 상태를 낱낱이 파악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현지 의사들의 소견서와 수십 장의 정밀 뇌 영상(DICOM)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하며 한국 전문가의 고견을 간절히 청했다.
■차가운 의학적 진실과 멈추지 않는 인도주의적 고민
하지만 최재영 센터장이 검토한 현지 의료진의 소견서와 영상 자료 속 환자의 상태는 안타깝게도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최 센터장은 15일, “환자는 현재 자발 호흡이 거의 불가능하고, 동공 반사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사실상 뇌사(Brain death) 상태로 판단된다”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뇌 손상이 돌이킬 수 없는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냉정한 진단이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한국에서의 뇌 감압술을 간절히 원한다면, 온병원 측은 언제든 문을 열어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최 센터장은 “보호자 측이 굳이 뇌 감압술을 원한다면 자가용 비행기를 대절해서라도 당장 온병원으로 오시면 감압 수술 자체는 해드릴 수 있다”고 밝혔다.
다만 전문의로서의 진솔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보내온 현지 의료진의 소견서와 영상들을 면밀히 검토했을 때, 이미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물리적 이동과 수술은 자칫 무의미한 과정이 될 수 있어 깊이 우려된다”며 환자의 고통과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걱정했다.
■국경을 넘은 삼각 소통, 그 자체로 찬란한 인류애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국회의원은 같은 나라 재계 유련인사의 딸을 살리기 위해 한국의 전직 외교관에게 손을 내밀고, 그 외교관이 고교 동창인 의료 경영진을 거쳐 부산의 뇌외과 전문의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베트남 중환자실의 환자 남편과 실시간으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의학적 진단을 나누는 이 기적 같은 소통.
비록 의학적 현실은 가혹하고 시간은 촉박하지만, 한 명의 서른 살 우크라이나 여성을 살리기 위해 한국과 우크라이나, 베트남 3개국이 보여준 국경 없는 연대와 헌신은 차가운 국제 정세 속에서도 인간의 온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증명해 보이고 있다. 지구촌 한구석에서 피어난 이 눈물겨운 미담은, 생명을 향한 인류의 발걸음이 언어와 국경을 넘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다.
